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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던 어제밤


시키호르 섬에서 머물고, 다시 두마게테로 돌아왔다.
나는 이 작은 도시를 좋아했다.

돌아온 첫날, 며칠전 묵었던 숙소에서 낯익은 이들의 환대를 받고
해안 산책로에서
한 손에 산 미겔 맥주를 들고
이어폰으로 탱고 음악을 들으며
라랄라 해지는 바닷가를 산책했다.

실리만 대학 작가 워크샾에서 엮은 재기 넘치는 단편집을 읽고
이 대학 문학부에 잠깐 다녀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여기 등록금은 한 학기에 고작 오륙십만원.
어학 연수 대신 대학에 잠시 입학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입학보다는 졸업이 어려운 시스템이라고)

그러나 이런 나의 즐거움은 단 이틀만에 완전히 사라졌다.

어젯밤 나는 이 곳을 거의 끔찍하게 여겼고,
필리핀을 떠나고 싶다고까지 생각했다.

한국 유학생들로 인한 일이다. 왜 내가 한국 남자애들과 이틀 밤 술을 마셨을까.
언듯 보기에는 다들 멀쩡해보였다.
긴 머리, 그냥 막 기른 수염, 탈색하거나 웨이브펌을 한 머리칼.
- 그래, 이게 나의 '멀쩡함'의 기준이다.

그들은 나에게 친절했다.
두마게테 피씨방에다 USB를 둔 채 시키홀 섬으로 왔다는 것을 깨닫고
패닉 상태에서 아는 분들에게 전화를 했을 때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피씨방에 가서 USB를 찾아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 대해 나쁜 말을 하기 저어되기도 한다.
호의와 친절에 대한 보답으로서는, 적절치 않으니까.
나에게 맛있는 술을 사주고, 값싼 밥집을 가르쳐주고, 좋은 관광지를 소개시켜 줬다.

하지만 나는 다시 그들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
말라테 거리에서 만난 게이 이야기를 하니 드러내는 호모포비아.
결혼 안 하고 글 쓸 거라 하니까 '사람이 사람을 낳아야지, 작품을 낳아서 되겠냐 / 남자를
싫어하냐, 왜 결혼 안 한다 그러냐'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미묘한 경멸,
이상한 성역할 고정관념.

...... 뭐, 그래, 여기까지도 상관없다 치자.

결정적으로, 어제밤
한 사람이 말했다. "X가 그러는데 시키홀에 좋은 곳이 있대. 단 오백페소가 필요해."
나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다.
성매매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를 제외하고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그 주제로 신나라 떠들기 시작했다.
한 남자애가 살짝 내 눈치를 보자.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선량하고 가장 눈이 맑은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 이쪽도 다 성인이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개새끼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내 말을 못 들었다. 들었어도 자기들보고 한 말인 지 몰랐을 것이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 취한 사람도 없었다. 그냥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 화제였다.

한국에서 오는 친구가 육포와 소주 등을 가지고 온다 하자
그거들고 어디 가서 먹자, 고 말하다가
'우리 여자끼고 먹을까?" 하며 웃었다.
그들은 고작 스물 대여섯이었다.

몇 가지 기분 나쁜 음담패설도 더 있었지만 생략.
소녀시대에 대한 것도 있었다.
날 편하게 여겨줘서 감사하다고 해야할까.

그런데 왜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던 걸까.
고작 소녀시대 이야기가 나올 때만 손사래치며 짜증을 냈을 정도이다.
정말 중요한 성매매 이야기에서는
나는 침묵했다. 왜 나는 그 자리에서 성매매는 범죄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아니면 그냥 평소 상비하고 다니는 론리플래닛을 꺼내
몇구절을 읽어주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이들 업소는 (여성들이) 매춘으로 버는 돈의 대부분을 숙식비와 경찰에게서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갈취해 간다.... 필리핀 아동 성학대 문제의 이면에는 끔찍한 침묵의 문화가 도사리고 있다... 대부분 이런 침묵은 매수된 것이다. 주모자와 눈 감아주는 대가를 돈을 받는 법률 집행자들 모두 어린이 매춘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당신들이 하는 짓은 착취와 학대의 사슬고리 속에 있는 거라고
범죄자라고, 가해자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하다못해 넌지시 암시라도 했어야 했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상의 화제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죄의식없이 환히 웃으며 여자들 서비스 같은 거 말해서는 안된다고
- 했어야 했다. 나는 하지 못했다

왜?
분위기를 깰까봐?
그들이 내게 술을 사주고 있어서?
가장 큰 이유는 후자인 것만 같고 그래서 나는 내 자신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고작 술 값 몇 푼 때문에 나는 비굴하고 비겁해졌다.
밤새 이를 갈았다. 나 자신에게. 
아주 잠깐 울기도 했다.
잠이 오지 않았고 몇 명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다행히 늦은 밤이라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위의 대사에서 나온 X,
시키홀의 좋은 성매매 지역을 학생들에게 소개시켜 준 그는
내가 묵고 있는 숙소의 주인이다.
그와 함께 가야 좋은 여자가 있는 곳을 갈 수 있다고 그들은 말했다.
매춘 알선. 이네.
나는 X가 쾌활하고 친절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아마 그는 좋은 사람이겠지.

나는 오늘 바콜로드로 간다.
여기를 떠나고 싶다. 하지만 필리핀 어디에서도 자연스럽게 성매매를 즐기는 이들이 있겠지.
필리핀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매춘관광지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어차피 내가 만난 이들은 한국 유학생들이다.
한국 유학생들이 필리핀에서 벌이는 행태가 싫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은 실상 우스운 일이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내 등 뒤에서.
어제밤 나의 침묵 뒤에서.

(그들은, 몰라서 그랬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모르는 것도 죄라고 생각하지만
알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기활도 다녀왔으면서, 성매매 반대 글도 썼으면서
나는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명백히 실망했다.)

시월의 마스카라 페스티벌이 끝나면
인도네시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시 마닐라로 가자, 고 어제밤 생각했다.
마닐라의 여성 인신 매매 반대 연합이나, 아시아 어린이 매춘 관광 반대기구 등에 가서
얼마간 자원 봉사를 하고 싶다.
영어도 필리핀어도 못하지만
봉투 붙이기나 복사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

# by 赤燐 | 2008/10/08 14:36 | 트랙백(1)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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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만사 다 귀찮아… at 2008/10/19 12:31

제목 : 그냥 저냥 두서없이 쓰는 글.
악몽 같던 어제밤성매매 여성들은 분명히 희생자일테지. 하지만 동정의 대상은 아닐거야. 난 앞에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들이 부러워. 그럴 수 있는 용기가 부럽지. 행동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서지 않는 나로서는 무척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그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무엇인지는 몰라.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일지도, 동정일지도,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일지도, 그도 아니면 단순히 자기 과시욕일지도 모르지만. ......more

Commented by 가솔린 at 2008/10/22 00:38
알것같은 기분이에요, 스스로의 신념, 스스로와의 약속을 자기도 모르게 배신하게되는 그런거
Commented by 赤燐 at 2008/10/24 12:34
가솔린, 벌써 그걸 알다니 ㅜ ㅜ
Commented by 이태용 at 2009/03/14 00:08
이세상에 완전한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지금님이 느끼신것이 잘못된건 아니지만....

님의 관념으로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는 마십시요...

안타까운 부분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것이 잘못되어있는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들의 삶은 그들에게 달려있겠지요...

도울수 있다면 도우면 되고요 돕지 못한다면 마음이라도 보태면 되겠지요

그들의 삶이 그들이 원해서 이루어진것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모순과 조화 마저도 포용할때 모든것을 이해하고 사랑할수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떠한 생각만을 옳다고 한다면

결국 또다른 문제를 낳겠지요

그 편견으로 말입니다.

Commented by dormin at 2009/04/07 14:51
느낀 것이 많아요. 그 사슬의 가장 큰 고리는 그걸 그냥 여흥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넘겨버리는 사람들이 쥐고 있겠죠.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타륜 at 2009/04/08 15:59
예전 글들을 보셨군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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